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권-위구르 관계 (문단 편집) ===== 위구르 인권 문제가 과장되었다? ===== 중국 및 대한민국의 [[친중]] 성향 인사들 측에서는 물론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반박을 내놓는다. 한족들이 78년부터 수십년간 엄격한 [[계획생육정책|한자녀 정책]]을 적용받았던 것과 다르게, 위구르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은 [[계획생육정책]]에서 예외가 주어져 농촌 지역 위구르인들은 3자녀까지 벌금 없이 출산이 가능하였으며, [[가오카오]] 시험에서도 가산점을 받았다는 것이다.[* 미국과 같은 [[역차별]] 논란이 많은 인종별 쿼터제가 아니라, 시험에서 5점, 10점, 20점 가산점을 주는 방식이다.] 물론 신장 재교육 캠프가 시행되는 시점 전후로 중국의 한자녀 정책은 폐지되었고,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한 보통고등학교학생모집전국통일고시 가산점도 폐지되는 추세이다. 2010년대 후반 이후 상황에서 보면 [[신장 재교육 캠프]]에서의 강제 수용 인권 침해 및 강제 불임수술과 집단 강간 등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일부 특혜만 언급한다는 것은 엄연한 [[논점일탈]]이다.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관계, 소련 붕괴 이후에는 국제 사회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꾸준히 바뀌어왔다. 중화인민공화국이 소련과 친하거나 소련과 국력 차이가 벌어져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시절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관용책이 시행되었으나[* 소련에서는 [[레닌주의]]에 입각하여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, 동시에 제3세계에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는데, 이웃 국가에서 대놓고 소수민족에게 1자녀 정책을 강요하면 이런 소련의 입장도 어색해질 수 밖에 없었다.] 반대로 중국이 소련과 서로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는[* 스탈린 사후 [[수정주의]] 논쟁이 벌어지면서 [[중소관계]]가 악화되었고 이후 [[중소 국경 분쟁]]도 일어났었다.] [[문화대혁명]] 당시 티베트인, 위구르인, 회족 포함 여러 소수민족들이 전통 문화 유산이 사라지고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. 다른 한편으로는 2010년대 [[아랍의 봄]]이 하나씩 실패한 이후 아랍-이슬람권은 팔레스타인, 카슈미르 문제 등에 대해서 단합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,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위구르인 동화정책을 비교적 욕을 적게 먹어가며 위구르인들을 동화시킬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.[* 비교하자면 중국은 [[티베트 자치구]]에 상당수의 중국인들을 이주시켰고 티베트인들 중 중국인들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티베트인 민족 정체성이 점차 희석되어가고 있다. 그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경우 한족들을 대량 이주시켰음에도 한족과 위구르인들이 서로 결혼을 안 하고 위구르인 민족 정체성이 별로 희석되지 않다보니 중국 측에서는 [[https://news.v.daum.net/v/20191205174649922|제 2의 홍콩이 되는 것 아닌가 위기를 느끼는 것]]] 전후맥락을 다 자르고 위구르인 탄압이 약했던 시절 주어진 특혜만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셈이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his=문단, title=중국-위구르 관계, version=18)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